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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박사 칼럼

이성낙 박사 칼럼

박생광의 ‘명성황후’와 피카소의 ‘게르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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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생광의 명성황후와 피카소의 게르니카

 

 

2002년경 경기도 용인에 위치한 이영미술관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곳에는 가()건물을 연상케 하는 허름한 건물 몇 채가 있었는데, 새로 개관한 미술관이라고 하기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들었다. 의외의 건물을 접하고 생소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건물이 이전에 양돈장(養豚場)으로 쓰였다는 것을 알고 더욱 놀라워하며 왠지 돼지 냄새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견은 미술관 안에 들어가 말끔하게 단장한 벽면에 전시된 그림들을 보는 순간 싹 사라지고 말았다.

 

 

박생광(1904-1985), 전혁림(1916-2010), 정상화(1932-)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어 가히 황홀 지경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박생광의 그림이 돋보였다. 박생광의 작품은 샤머니즘과 관련이 많다. ‘무당(巫堂) 그림이라고도 하고 너무 한국적인 그림이라고 거리를 두는 애호가도 있다. 아마 강렬한 원색에 역동적인 화면 구성 때문이라고 본다.

 

 

박생광의 작품을 감상하던 중 유난히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어 가까이 다가갔다. 그 작품은 전시 기획자가 모든 관람객에게 꼭 보여주려는 특별한 의도가 숨어 있는 듯 한쪽 벽면 전체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그림 구성은 다른 작품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도 하얀 소복(素服)차림의 여인이 후광을 베개로 삼아 평온하게 누워 있는 모습이 어쩐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내 시선은 자연스레 작품명 쪽으로 향했다. ‘명성황후라고 표기된 것을 보는 순간, 절규하는 소복 차림의 궁녀와 조선 병졸이 눈에 들어오고 일본 무사의 얼굴과 번뜩이는 칼 그리고 뒤집어진 궁가(宮家)와 연꽃이 보였다.

 

 

우리 가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쓰사린 역사의 정점인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작가는 그림으로 형상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내 머릿속에는 피카소 Piblo Picasso(1881-1973)게르니카Gernika(바스크어), Guernica(스페인어) 가 떠오르면서 감사하다는 마음이 절로 솟구쳤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1892-1975)군을 지원하던 나치가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조용한 마을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해 1,000명이 넘는 무고한 주민을 참살했다. 마침 파리에 머물던 피카소는 파랑코 독재자와 나치의 만행 소식을 듣고 참을 수 없는 울분을 화폭에 옮겼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에 길이 남은 게르니카.

 

 

필자는 피카소 서거 25주년이 되던 1998, 명작 속의 마을 게르니카를 찾아갔다. 그곳은 바스크 지방의 조용한 농촌 마을로, 어떠한 군사적 가치도 없어 보였다. 단지 바스크 지방의 정신적 중심지라는 이유로 이 마을에 만행을 저질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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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 박생광 作. 종이에 채색, 크기 200×300cm ]

 

피카소의 게르니카의 명작으로 꼽히는 것은 대형 화폭(349×776cm)에 당시로서는 생소한 반추상적 이미지로 미친 듯이 요동치는 말발굽 밑에서 힘없이 죽어가는 희생자들의 처참한 모습과 살려달라고 몸부림치는 절규가 들려오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장면이 보는 이를 압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피카소가 오지에 위치한 게르니카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나치의 만행을 규탄하는 작품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 사건은 아마도 세인의 무관심 속에 잊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역사화(歷史畵)가 지닌 소중한 가치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한일 간에 독도 영유권 문제로 다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요즘, 박생광의 작품 명성황후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명성황후를 국내외에 널리 알려 한 세기 전 서울 한복판 경복궁 건청궁에서 일본 낭인들에게 국모(國母)가 무참히 시해된 사실을 전 세계인에게 상기시켜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보여주듯 예술로 승화한 역사 기록화는 국경과 민족을 넘어 모든 사람의 마음에 파고들어 잠든 이성을 깨울 수 있기 때문이다.

 

 

_이성낙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 사진제공_서울 로댕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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