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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박사 칼럼

이성낙 박사 칼럼

고려청자 앞에 서면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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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청자 앞에 서면 숙연해진다.



얼마 전 리움 삼성미술박물관의 고려청자실을 찾았다.

자연광이 완전히 차다된 캄캄한 암실에서 최소한의 조명만 받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듯 전시된 고려청자(高麗靑瓷)를 보며 마을이 평정해짐과 함께 숙연함을 느꼈다. 청자가 풍기는 분위기가 결코 권위적이지 않은데도 말이다.

 

우리는 청자가 아름다운 비취(翡翠)색을 지니고 있으며, 그 곡선미가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청자를 언급할 때면 빼놓지 않고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고려청자를 빚은 도공(陶工)들이 자기 자식에게도 청자색(靑瓷色)을 내는 비법(秘法)을 전수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 이러한 말속에는 아쉬움보다는 폐쇄적인 도공의 심성을 탓하는 뜻이 강하게 담겨 있으리라.

 


아주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1962년 대학생 시절 한국 고미술계의 거성이신 최순우(
崔淳雨) 선생께 고려청자 하면 아름다운 색이 먼저 거론되고 그 색을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아직 구현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우문(愚問)을 드린 적이 있다. 그러자 선생은 청자 색깔은 오늘날의 기술로 어렵지 않게 재현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1000년 전 그러니까 10세기 한반도에 살았던 고려인들이 유난히 청자색을 선호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우리 조상은 청자색의 자기(瓷器)만 선호한 것이 아니라, 비취색 의상(衣裳)도 좋아했다. 오늘날 우리의 한복 바지저고리나 마고자에서 옥()색을 흔히 볼 수 있는 것도 당시 우리 선조의 높은 색감(色感)과 유관하지 않겠느냐고 현답(賢答)하셨다.

 


우리 청자는 960-980년경인 10세기에 고려에서 처음 나타난다. 석기(
石器)시대 이후 세계 도처에서 만든 도기(陶器)가 아닌 자기(瓷器)가 중국에서 출현한 것이 AD 75년경, 1세기경이고 우리가 말하는 청색을 가진 청자기 출현이 당대(唐代) 8세기라면 중국에서 한반도에 청자가 전해오는 데는 200년이나 걸렸으며, 자기 역사로 치자면 1000년의 세월이 걸렸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중국에는 청색 유약(釉藥)을 몰림이나 흘림 없이 골고루 바른 아름다운 자기가 나오기까지 오랜 기간과 수많은 졸품(拙品)의 실험 발자취가 있었는데 반해, 우리 고려에서는 초기부터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춘 고려청자가 불쑥탄생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로 윤용인 교수(명지대 미술사학과)는 송대(宋代) 후기 나라가 혼란해지자 자기 장인들이 중국에서 고려로 옮겨 온 결과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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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양각죽절문병(靑瓷陽刻竹節汶倂): 고려시대, 리움미술관 소장, 높이 33.8cm, 입지름 8.4cm, 밑지름 13.5cm]

그렇다면 당시 중국의 최첨단 기술을 우리 고려의 선조들이 선뜻 받아들인 것도 예사롭지 않지만, 이를 14세기까지 더욱 발전시키면서 고려청자라는 고유 예술품으로 등극(
登極)시킴으로써 오늘날의 후손이 전 세계 도예(陶藝) 미술사가들에게 아낌없는 송축(頌祝)의 노래를 듣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문화는 소비자가 만든다라고 한다면 고려청자의 가치를 꿰뚫어본 우리 선조의 눈높이가 마냥 자랑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는 고요하고도 지극히 섬세한 고려청자에서 옛 선조의 선심(
善心)을 느끼기에 절로 숙연해지는가 싶다.

 


_이성낙·가천의과대학교 명예총장, 사진제공_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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